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교정을 떠난 지도 어언 38년, 50대 후반,
10 수년 전, 직장생활에 푹 빠져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친구 낙현이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나 낙현이, 놀랬지? 동창 모임을 가지려고 하는데 모월 모일 모시에 모 호텔 커피숍으로 나와.”
어떻게 내가 포스코 광양제철소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냈을까 의아해 하면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 나 자신, 내가 전남고를 다녔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공부한 친구들 조차 까맣게 잊고 오직 직장생활에만 전념하느라 모교와 동문들에게 무관심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승용차에 몸을 싣고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호텔 커피숍에 들어가니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드문드문 각자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도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한참 정적이 흐르고 시간이 되자 약속이나한 듯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 영남이, 영남이 맞지?’ ‘그래 너 누구, 누구 맞지?’ ‘오랜만이다.’’몰라보겠다.’ ‘의젓하다.’ ‘조금 까졌구먼.’ ‘어디 사냐?’ ‘애들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 서로가 동창생임을 확인하고 모임은 시작되었고 나 자신은 모교를 다시 찾게 된 기쁨과 친구들과의 재회 그 자체로 들뜬 기분좋은 하루였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광주에서 모임을 가졌었다. 친구들은 내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일과 시간을 배려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친구들, 낙현이를 비롯하여 영근이, 기현이, 성모, 상인이, 길성이 그리고 금자, 명자, 덕례, 순옥이, 명숙이, 서울에서 가끔 내려와 주었던 경숙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날아와준 부순이, 참 점증이도 빠짐없이 나왔었지, 모두에게 감사한다.
그래 우리들은 가끔 그리고 자주 만나 서로에게 나와준 데 대하여 감사하며 참으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 친구들아 고맙다.
그러던 중 나는 생각지도 않은 포스코 도쿄연구소로 전근명령이 났고. 우리 가족은 어쩔 수 없이 4년간 일본 도쿄에서 생활하였다. 사실 공정제어에 관한 기술연구를 위해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 긴자 한복판에 연구소를 차려놓고 나를 보낸 것이었지만, 기술연구보다는 일본연구 아니 도쿄연구를 더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4년간의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다시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동창등과의 만남은 다시 이루어 졌다. 이 대목에서 인재를 중요시 하고 적재적소에서 모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포스코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젊음을 바쳐 27년간 일해온 포스코, 광양제철소 전기제어부장을 끝으로 퇴직하고 포스코의 전기제어분야 자회사인 포스콘 상무이사로 자리를 옮겨 포항과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어 2회 동창모임에는 자주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4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모교에서 열리는 체육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서울에 있는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어 동행할 친구들을 모집하였다. 말벗 삼아 승용차편으로 같이 내려가려고 말이다. 처음엔 다섯 자리가 모두 찼었는데 행사 일이 가까워 옴에 따라 한 사람 두 사람 사정이 있어 못 간다는 연락이 오더니 금요일 저녁에 마지막 남은 한 친구도 못간다는 연락이 왔다.
나 자신도 일본 출장에서 전날 귀국하여 피로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승용차를 운전하고 광주에 내려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가족의 만류도 있고 해서 KTX편으로 가기로 하고 인터넷 예약을 하느라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집사람이 친구들 만나러 가는 게 그렇게 좋으냐 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워 하는 눈치였다.
다섯 시경 광주에 도착하여 2회 동창생들을 만나 전야제를 성대하게 치렀다. 적당히 취기가 돌만큼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도 부르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상무지구에 있는 호텔로 돌아와 1회 선배님이신 만우형에게 전화를 드렸다. 혹시 광주에 와 계시면 오랜만에 만나 술 한잔 대접하고 싶은 생각에서 였다. 그리고 나도 금년에는 총동문회 체육대회에 참석한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려고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는데 다음날 새벽 KTX편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이었다. 일본 출장중 쌓였던 피로를 풀라는 뜻으로 알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 아침 8시경 만우형이 아침이나 같이 하지고 전화를 해왔다. 호텔에서 만나 해장국 집으로 향하는데 3회 졸업생 들이 토끼 눈을 하고 모여 있었다. 어젯밤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다. 그래서 1, 2, 3회가 오랜만에 같이 모여 해장국으로 속을 푼 정말 좋은 아침이었다.
새로이 상무지구로 옮긴 모교에 가서 접수를 하고 모교를 한 바퀴 둘러 본 후 체육대회에 참석하였다. 행사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주최측에서 준비해준 홍어삼합, 온생두부에 노란 조껍데기술, 기가 막힌 궁합으로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행사를 준비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며 내 자신을 즐기고 있었다. 역시 일정표에 표시를 해놓고 약속이 겹치지 않게 관리해온 보람이 있었다.
총동문회 체육대회에 다녀온 이후 재경 동문회로부터 모임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동문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 동안 이런저런 동문회 모임을 참석해 보고 주관해 보기도 하였으나 이사회 모임만으로 이렇게 성황을 이룬 동문회 모임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막강 푸른숲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 동문들의 지대한 관심과 참여 속에 발전된 우리 동문회의 모습과 수많은 동문들이 여러 분야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가슴 뿌듯한 기분 좋은 모임이었으며 전남고인으로서 긍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 자신 전남고 재학시절 진공관 앰프로 학교방송을 했던 경험을 살려 지금까지도 취미로 진공관 앰프를 만들어 음악을 듣고 있는데 그 진공관 앰프를 만드는 솜씨가 오디오마니아 세계에 알려져 전주세계소리축제 위원회로부터 출품요청을 해와 ‘진공관과 소리의 만남’이라는 소리체험실을 운영한 적이 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현장에서 내가 직접 만든 여러 대의 진공관 앰프를 가지고 가서 내노라 하는 소리꾼들에게 공관 앰프의 진수를 알려준 진공관 소리체험실 행사를 성황리에 마치고, 그 당시 전주에서 ‘청추원’이라는 동양화와 서예교실을 운영하고 있던 2회 동창친구 성모를 만나 집사람과 함께 시장골목에 있는 욕쟁이 할머니가 만들어 준 그 유명한 전주콩나물국밥에 모주라는 단술을 마시면서 학창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집사람이 ‘당신 달리 보여요’ 하는 한마디에 쌓였던 피로가 확 풀렸다.
그 뒤 우리 부부는 가끔 전주에 놀러 갔었는데, 그 때마다 베토벤 머리스타일을 하고 전주에 살고 있는 성모 친구를 불러내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화실에 들러 글을 몇 점 받기도 하였고, 무엇보다도 원로화가 이시고 전주 전통한옥에서 동양화를 그리시면서 여생을 보내시고 계시는 성모 친구의 부친 남주 홍신표 선생님을 찾아 뵙고 우리 부부가 큰절을 올린 것이 기억에 남는 일이다.
인생의 황금기를 살아가고 있을 2회 졸업생 오정삼이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동문 여러분, 누구 아시는 분 계십니까?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동문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즐겁게 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