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
조건없이, 춘향이 몽룡을 사랑하듯, 미쳐라
오디오전도사
2010. 6. 24. 10:28
"조건없이, 춘향이 몽룡을 사랑하듯, 미쳐라" (2010.6.17.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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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없이, 춘향이 몽룡을 사랑하듯, 미쳐라" 아시아경제 기사입력 2010.06.17 14:37 최종수정2010.06.17 15:00
[아시아경제 송화정 기자] 오후 8시 서울 도심의 한 강당. 청아한 뻐꾸기의 울음소리, 빗방울 듣는 소리. "청~산~리, 벽~계~수~야"하는 시읊는 소리에 판소리 심청가 한 대목까지.
강남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휴넷이 주최하고, 아시아경제신문이 후원한 명사 특강,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은 75세라는 물리적 나이를 소리로 극복한 듯 했다.
뻐꾸기 울음과 빗소리는 그의 처녀 가야금 작품인 '숲'(1962)의 한 대목, 물론 가야금을 뜯어 나온 소리, 시와 판소리는 200여명의 청중을 위해 선생이 직접 시연한 소리다.
황 선생은 '황병기의 음악과 가야금의 세계'라는 강연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가치있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평생 만들어 온 음악은 이같은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었다.
6·25 피난 시절 부산에서 우연히 들은 가야금 소리에 매료돼 평생 가야금과 함께 해 온 선생은 국악에 작곡이란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 최초로 가야금 곡을 작곡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그의 말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을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일이기도 하다.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경기 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가야금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가야금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고교와 대학 시절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국립국악원으로 가서 매일 가야금을 배웠어요. 하루도 거른 일이 없어요. 내가 좋아서, 미쳐서 한 일이지요. 춘향이가 몽룡을 사랑하듯, 줄리엣이 로미오에 빠지듯 아무런 조건없이 말입니다. 가야금으로 밥벌이를 하겠다는 생각은 그래서 전혀 하지 않았지요"
195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서울대에 국악과가 처음으로 생겼다. 법대를 2월에 졸업한 그는 3월부터 국악과 강사로 나갔다. 음악을 직업으로 할 생각이 없던 그는 첫 입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딱 4년만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고 진짜로 4년 뒤인 1963년 그만두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없이 좋아하는 것,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목적이 없을 때입니다."
1962년 서울대에서 가야금을 가르칠 때 창작을 시도했다. 국악에 작곡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참고할 자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첫 작품은 현대시지만 전통성이 강한 서정주의 '국화옆에서'에 곡을 단 가곡이었다.
그러던 중 문득 가곡이 아닌 가야금 연주곡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온 게 '숲.' 박두진의 시 '청산도'에서 영감을 얻어 녹음, 뻐꾸기, 비, 달빛 등 총 4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대를 그만 둔 뒤 십여년간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극장 지배인부터 화학공장의 기획관리, 영화기획, 책 출판 등 이것저것 안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다시 대학으로 이끌었다. 1974년 그는 이화여대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교수로 초빙된 것. 그 해에 유럽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삶에 계기가 생기면서 그는 다시 작품활동에 나선다.

"뭔가 획기적인 곡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100% 조선음악이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려면 전통에서 탈피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조선음악의 틀을 부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틀을 부수는 것도 신중하게, 알맹이 있게 잘 부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거슬러 올라가 신라음악으로 조선을 깨기로 했다.
"무형문화인 음악은 연주하는 순간 공중으로 사라집니다. 때문에 신라 음악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러나 신라 도자기나 기와 등 유형의 문화재는 남아 있기에 이를 보면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경주로 내려가서 유형으로 남아있는 신라를 보면서 이를 음악으로 움직이는 작업에 몰두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침향무'다.
"신라 사람들에게 무용곡 작곡을 위탁받았다는 가정으로 작곡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천마총에서 나온 페르시안 유리술잔을 보고 '비단길'을 작곡한다. 비단길은 동서문화의 교류의 상징이자 신라인들의 비단같은 마음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의 전통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음색은 '침향무'를 시작으로 '비단길'을 거쳐 2001년에 작곡한 '하마단'으로 이어진다.
그는 "하마단은 페르시아 고대 도시 이름으로 지금의 이란을 가리킨다"면서 "하마단의 뿌리는 침향무"라고 말했다. 하마단을 들으면 화려한 비단과 악세사리로 치장한 페르시안 무희들이 이 곡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맨 처음 작곡할 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얘기지만 불가능한 일은 가능해집니다. 바위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건 처음에는 바위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하찮은 일이지만 오랫동안 반복되면 구멍이 뚫립니다.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거지요."
그는 끝으로 "나는 재미있는 음악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얼마전 돌아가신 법정스님께서 '비단길'을 즐겨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감격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법정 스님 같은 분들이 깊은 산속에서 명상을 할 때 듣는 음악, 즉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쓰다듬는 음악, 한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 한국 내에서도 황병기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순수한 물 같은 음악말입니다."
송화정 기자 yeekin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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