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과 나
취미생활과 나
('02.7.7. 김영남)
중학생 시절,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각 가정에는 승압트랜스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집 승압트랜스는 과전압 부져가 자주 울렸고, 그 때마다 전업사나 전파사에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분해해서 권선비를 세분화하여 탭을 설정하고 재권선하여 조립하고 다시 사용하는 재미를 나는 느끼고 있었고, 가족들은 나를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공관 5구 슈퍼헤테로다인 방식의 라디오도 중학생 시절에 조립해 보았고, 더 나아가 영사기를 만든다고 카본봉(연필심)을 사용한 아크방전시험을 아무 방호조치 없이 계속하는 바람에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쓰는 신세가 되었다.
1967년 3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학교방송반 활동을 하는 바람에 아침 일찍 등교하여 행진곡 등을 틀어 주고 점심시간에는 교향곡이나 실내악곡 등을 틀어 주면서 고전음악을 즐겨 듣게 되었다.
1970년 3월 대학에 진학해서도 학교방송국의 기술부장으로서 활동을 계속했었고, 아르바이트로 6V6 싱글 스테레오 장전축을 만들어 당시 유행하였던 전축 계모임에 공급하여 학비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 때 학교방송의 앰프는 100TH라는 대형 송신관을 사용하고 있었고 정류관으로는 3B28이라는 수은봉입 고압 대전류 단파관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류관의 필라멘트가 자주 나가 말썽을 피웠으나 이 정류관은 시중에는 유통되고 있지 않아 쉽게 구할 수도 없어 며칠씩 방송을 중단하는 어려움을 격기도 했었다. 그 때마다 광주 공군비행장의 통신대에서 에밋션이 저하되어(수명이 다되어) 폐기처분하는 것을 얻어다 쓸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몇 년전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에서 보랏빛 방전 불빛이 아름다운 3B28과 옛날 호야불과 같이 생겼고 전원을 넣으면 플레이트가 빨갛게 달아올라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송신관 100TH를 발견하고 학창시절의 감회에 젖기도 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3B28을 사용하여 정류부분만 별도로 만들어 기존의 정류관을 빼내고 정류관 소켓에 소켓접속으로 연결하여 아름다운 불빛을 감상하는 (물론 대전류의 정류가 가능하여 전압드롭이 적고 안정적인 전원공급이 가능하여 음질개선의 효과도 있지만) 복고풍이 유행하고 있다.
군대에서도 통신병과의 장거리 통신병으로 있으면서 진공관 통신장비를 수 없이 접할 수 있었고 100TH나 3B28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 100TH를 사용한 싱글 스테레오를 만들어 가끔 대학시절과 군대시절을 회상하며 현악을 즐기고 있는데 이것 또한 별미이다.
1978년 1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입사하였고, 1979년 독일로 연수를 갔었는데 군대시절 같은 싸이트에 근무했던 G I (미군)를 우연히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길거리에서 만났고 세상이 참으로 좁다는 것도 그때 느꼈다. 그 미군은 나토방위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한국을 무척 좋아했었고 나도 그 미군과 그곳에서 자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 미군이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나에게 귀국선물로 미군 PX에서 사준 것이 파이오니아의 120왓트급 트랜지스터 리시버 앰프였다. 포항에 있으면서 그 앰프로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러던 중 1985년 2월 광양제철소로 전근명령이 났고, 우연한 기회에 고향집에 보관중이던 옛날에 쓰던 부품상자와 고물상자를 광양으로 옮겨와 제니스 진공관 7695를 사용해 2왓트급의 아주 간단한 싱글 스테레오 앰프를 만들어 보았다.
이것을 당시 120왓트의 위용을 자랑하던 파이오니아 트랜지스터 앰프를 때어내고 장난삼아 물려보았는데, 하루 종일 들어도 피곤하지 않은 따뜻하고 단정한 소리를 내주었다.
이것이 내가 다시 진공관으로 돌아오게 된 배경이다.
나는 주로 직열 3극관인 RCA 2A3이나 WE300B를 사용하여 내 귀(취향)에 맞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회로설계를 반복하고 전압도 조정해 보고 그래도 안되면 부품도 교환해 가며 기어히 현악기라면 손가락의 현터치, 현의 질감이나 배음 그리고 현에서 송진가루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의 자연스러운 음색과 음질, 밸런스와 스케일감, 공간감과 현장감 등등 각 악기의 소리가 깔끔하고 명쾌하게 표현되고 악기의 배열, 연주자의 발놀림 등 입체적인 울림과 열기까지 표현해 주어 실제로 라이브홀에서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소리를 내줄 때까지 앰프와 씨름했다.
그러한 덕택에 남들처럼 오디오 시스템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바꿈질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내 귀에 맞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
1997년 7월 도쿄연구소로 전근명령이 나자 나와 가까이 지내는 주변의 오디오매니아들이 일본 아키하바라에 가면 이곳보다 좋은 부품을 훨씬 쉽게 구할 수 있을 터이니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나 하고 가라는 속삭임에 모두 처분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자작하여 듣고 있던 2A3 싱글과 마란츠 7회로의 프리앰프는 서울치과의 조원장에게, 2A3 푸슈풀은 모 건설회사의 이 상무에게, WE 벨마크의 300B를 사용한 싱글 모노블럭은 서울의 일본계 회사에 근무하는 최전무에게, 300B싱글은 방치과의 방원장에게, 그리고 J.A. 미첼의 GYRODEC 턴테이블, 오르토폰의 SME3010 톤암, WADIA 8과 15의 CD 트랜스포트와 DA 컨버터는 모 감리회사의 김상무에게, 스피커 탄노이 GRF 메모리는 연구소의 윤박사에게, 보작 P4000은 방치과의 방원장에게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의 번화가인 긴자에 있는 포스코 도쿄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눈코 뜰새없는 바쁜 생활을 하였고, 본국이 IMF의 관리하에 들어감에 따라 각 기업이 서둘러 감원과 경비삭감 등의 구조조정작업에 들어갔고, 그 첫 번째 타겟이 해외사무소였으며, 우리 회사도 예외없이 주재수당을 대폭 삭감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녀의 대학진학을 위한 괴외학습마져도 부담이 되었고, 가족과의 도쿄생활 그 자체가 힘들 정도였으니 오디오나 음악감상 따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휴일이면 아키하바라에 들려 아이쇼핑, 즉 어느 가게에서 아떤 부품을 팔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는 수준으로 만족해야 했다. 일본에 도착하면 바로 만들어 즐거운 음악생활을 계속하겠다고 한국에서 가지고간 CD 700여장은 내방 한쪽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오디오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행도 가지 않고 남들 다하는 골프도 자제해 가며 모은 용돈으로 트랜스와 샤시만 있는 중고킷트를 구입하여 6L6GC와 같은 특성이면서 저렴한 7581A 빔관을 사용하여 푸슈풀 앰프를 만들고, 내가 가끔 들렸던 째즈바에서 엣지가 손상되어 버리려 하는 JBL의 XPL160 스피커를 얻어다 엣지만을 구입하여 수리하였다. 재생한 스피커이긴 하지만 썩 괜찮은 소리를 내주었고, 지금도 현용기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나의 일본에서의 오디오 생활은 시작되었다.
어렵사리 장만한 오디오시스템은 내가 살고 있던 도쿄 신쥬쿠 다카다노바바의 게이트원이라는 째즈바의 라이브 컨서트의 음이 기준이 되어 조정되고 튜닝되었고 틈만 있으면 째즈CD를 걸어놓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물론 이것이 최근 내가 영혼의 음악인 째즈를 좋아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째즈바 게이트원에 들렸더니 어제 저녁에 오디오가 고장이 나서 그것이 수리될 때까지 약 2주간 가게를 닫아야겠다고 보칼리스트인 주인 마리코여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리코여사에게 정중히 가게는 마음대로 닫는게 아닙니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 경영이 어려워 폐업신고를 내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렇게 손님이 많이 찾아와 째즈를 즐기고 담소하는 공간을 어떻게 마음대로 문을 닫는단 말입니까?
내가 한국에 약 1주일정도 출장을 가니까 우선 우리 집에 있는 내 오디오를 가져와 영업을 계속 하시라고 제안했고 혼쾌히 받아들여져 7581A 푸슈풀 앰프는 온쿄의 트랜지스터 앰프와 대체되어 영업을 계속하였다.
출장에서 돌아와 일부러 일주일간은 게이트원에 들리지 않다가 고장난 온쿄 앰프의 수리가 끝났을 것으로 생각되는 날에 게이트원에 가 보았더니, 일본의 유명한 킹레코드사의 양악부 디렉터 모리카와씨가 들렀었고, 자신이 다녀본 음악감상실중 가장 리얼한 음악을 들려준다고 극구 칭찬하고 돌아 갔다는 얘기와 함께 저에게 모리카와씨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 뒤 모리카와씨는 자기가 기획 감독하여 제작한 견본품 CD를 나에게 보내 주는 친절을 배푸셨고, 그 CD를 내가 만든 오디오에 걸어 듣는 것을 좋아 하셨다.
게이트원의 주인인 마리코여사와 나와 친분이 두터운 게이트원의 손님들도 그 앰프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다. 그 심정은 나도 충분히 이해 한다. 한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면 귀라는 것은 간사해서 그보다 나쁜 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란츠 7 회로의 진공관 프리앰프까지 만들어 주었고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마리코여사는 내가 게이트원에 놀러가면, 나를 모르는 새로운 손님에게는 우리 가게 오디오를 만들어 주신 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리코여사는 내가 만든 오디오로 바꾼 뒤부터 고질적인 두통이 사라졌고, 피로를 모르며, 항상 밝은 표정, 밝은 마음으로 응대할 수 있어 손님이 늘었고 손님들도 모두 게이트원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은근히 자랑하였다.
그때 받은 실비에 조금 보태어 평소 꼭 만들어 보고 싶었던 845싱글 앰프의 제작에 도전하였다. 트랜스포머가 커서 무게가 거의 40kg에 육박하는 중량급이었는데 소리는 기대에 못미쳤다. 약 1년여 동안 씨름을 하였는데 드라이브관12BH7A를 6BQ5로 바꾸어도 보았고 인터스테이지 트랜스포머도 대전류를 흘릴 수 있는 것으로 주문하여 바꾸어 보았다. 많이 개선은 되었지만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다.
우연히 진공관 세일을 하는 가게에 들렸는데 구 소련에서 만든 9핀의 6V6과 특성이 비슷한 6P1P라는 저렴한 진공관을 발견하고 구입하여 특성표를 참조해 가면서 조정한 결과 진가를 발휘해 흡족한 소리를 내 주었다. 845는 결국 전압드라이브가 아닌 충분한 전력드라이브를 걸어주어야 제소리를 내준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평소에 업무상의 관계로 친하게 지내오던 일본 유수의 전기회사에 근무하는 이와사키 부장과 저녁을 함께할 기회가 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2차를 가자고 제의해 왔으나, 째즈나 들으러 가자고 권유해 게이트원에 함께 가서 째즈를 들으면서 어떠냐고 물었더니 정말 듣기 편하고 리얼한 음을 들려 준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도 오디오매니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본래 취미일지라도 사생활에 해당하는 것은 잘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가 오디오매니아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러자 마리코여사가 와서 사실은 이 오디오는 내가 만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어려운 부탁이지만 자기한테도 똑같은 것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청을 해왔다.
그래서 그 다음주 일요일에 아키하바라에 그와 함께 가서 부품을 구입하여 틈틈이 배선하고 납땜하여 완성시킨 후 그의 집에 설치하러 갔었다.
그는 스피커를 자작하여 듣고 있었다. 나가오카 데츠오라는 유명한 스피커 시스템 설계 자작 매니아의 설계도를 이용해 만든 백로드 혼형 이었다. 그의 리스닝 룸과 스피커에 맞추어 그와 그의 가족들의 귀를 빌려 피드백을 조정해 가면서 튜닝을 끝내고 Sampler CD를 들어보았다. 정말 순발력과 여운을 고루 갖춘 음악성이 풍부한 좋은 소리를 내 주었다.
이 앰프의 주인이 된 이와사키씨와 엄청난 돈을 투입해 리스닝 룸을 만들고 수천만원어치의 고급 오디오제품을 설치하여 듣고 있는 주위의 오디오매니어 사토씨도 매우 흡족해 하며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숨어 있는 음까지 리얼하게 들려준다고 칭찬을 하며, 구름이 걷히고 얇은 커튼마져 제켜진 맑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이 주변에 소문이 나서 만들어 달라는 간청은 많았지만 바쁜 주재원생활로 인하여 더 이상은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오디오의 본고장 일본에 내가 만든 오디오가 한 대는 전문 음악감상실에서, 한 대는 오디오매니어의 리스닝룸에서 언제 들어도 피곤하지 않는 리얼한 소리를 내며 지금도 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부심을 느낀다.
이렇틋 음악감상과 오디오자작 이라는 좋은 취미 때문에 해외에서도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지역주민이나 다양한 뮤지션과 사귈 수 있었고, 우리나라와 우리회사를 소개하며,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여 즐거운 일본주재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001년 7월1일부로 귀국명령이 났다는 것을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 주자 일본 최장의 황금연휴인 골든위크의 마지막 날에 지역주민 20여명이 째즈바 게이트원을 전세내어, 각 가정에서 준비한 요리 한가지씩을 가져 오고 째즈바에서도 주인 마리코여사와 종업원이자 마린바연주자인 마이짱이 정성을 다해 일본음식을 만들어 성대한 송별연을 마련해 주었다.
나도 서울 출장시 준비한 한국민예품을 그들에게 전달하여 줌으로써 각 가정에 장식하여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날은 마리코여사의 남편이자 유명한 기타리스트인 하시모토 신지씨와 그의 친구들로 구성된 째즈연주그룹이 라이브연주를 해 주어 송별연은 한층 고조되었고 끝날무렵 모두 눈물을 흘리며 나를 전송해 주는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남들은 귀국할 때 일본제의 가전제품이나 가구, 주방기기, 그릇 등을 사러 다니느라 분주하였는데 나는 귀국하면서 노후의 취미생활을 위하여 진공관 몇 박스와 컨덴서, 저항, 트랜스포머 등의 진공관앰프를 만들 수 있는 부품들만 사가지고 왔다.
부산 용당세관에서 세관원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나는 속으로 '내가 퇴직한 후 노후생활을 즐겁게 할 꺼리를 준비한 것 뿐이야' 라고 말하고 야릇한 미소를 그에게 보냈다.
내가 다시 정열을 바쳐 일하고 있는 광양제철소에 복귀하여 고전음악동호회를 이끌고 있다.
건전한 여가문화를 정착시키고 신 바람나는 직장분위기를 형성해 보자는 취지로 형성된 회사내의 동호인 그룹이며 회사에서 마련해준 최첨단시설을 구비한 음악감상실에서 음악감상회가 있는 날이면 동호인 회원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인 순천, 여수, 남해 등지의 오디오매니어들이 동참하고 있으며 가끔 제가 자작한 오디오가 음악감상에 동원되기도 한다.
실내장식이 취미이고 조용하고 깔끔한 성품의 아내,
집에서 동호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가구의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고 공개음악감상회를 위해 거실의 시스템을 모두 음악감상회장으로 옮겨 실내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려도 화 한번 내지 않고 잘 이해해 주면서 음식까지 준비해준 아내,
다음날 시험인줄도 모르고 아빠가 고전음악이나 오디오 얘기로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해도 아무 불평없이 공부에 전념해준 딸 경현이.
가족 모두가 나의 취미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말없이 도와준 것으로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여보! 사랑해요, 경현아! 사랑한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에게 가족 그리고 음악과 함께하는 건전한 여가생활을 하실 것을 권하고 싶다.
음악감상은 취미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이며 스트레스 해소 등의 정신건강적인 측면이나 인격수양의 수단으로서 음악을 편히 듣는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음악은 제외하고 장르의 구별없이 비교적 폭넓고 다양하게 듣으실 것을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