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 특별대담◆
대담=박재현 부국장 겸 산업부장
박태준 명예회장은 인터뷰 내내 양복 윗도리 단추를 풀지 않을 정도로 꼿꼿했다. 최근 스위스에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서인지 더욱 건강해보였다.
경제개발 초기 경험을 회상할 때는 간간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고, 정확한 수치까지 내놓을 정도로 기억력도 좋았다.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인도와 중국 베트남 지도는 요즘 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듯했다. 박재현 산업부장이 지난 23일 파이낸셜빌딩 집무실에서 박 명예회장과 2시간10분에 걸쳐 대담을 했다.
-건강해 보입니다.
▶보시다시피 좋습니다.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아직은 괜찮다고 하더군요. 검사받고 일주일 정도 누워 있었는데 나올 때 기분이 참 좋았어요. 그동안은 건강에 자신이 있었는데 그래도 80을 넘기니까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1000만t짜리 제철소를 2개 만들어도 건강이 괜찮았는데 말입니다(웃음).
-건국 60주년이 다가오는데 한국이 그래도 참 압축성장을 잘한 것 같습니다.
▶2차대전 이후 근대화된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첫 번째 아닌가요. 대만도 있지만 어차피 대중국 경제의 일원이고, 중남미는 잘나가다가 고꾸라졌고. 계속 성장하는 곳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봐도 우리나라가 아마 첫 번째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성장하다가 주춤하는 나라들도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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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합니까.
▶호텔에 들어갈 때부터 뭔가 선진국에 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호텔 매니지먼트가 국가 매니지먼트를 대표한다고 생각해요. 뭔가 불편한 호텔이 있는가 하면 편안한 호텔도 있듯이. 선진국은 호텔에서부터 역시 질서가 있고, 생산성도 있고. 지난달 파리에 열흘 정도 있었는데, 뭘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상황을 처리하는 데 모든 조건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마음이 편했어요. 편한 나라가 잘사는 나라, 선진국이 아닌가 싶어요.
-시스템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건지요.
▶1961년인가 5ㆍ16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 12월쯤 유럽에 갔어요. 그때 파리에서 머문 호텔이 있는데 중간에 몇 번 리모델링도 하고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있어요. 내가 처음 가본 이후 벌써 50년이 다 돼 가는데 지금도 내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매니지먼트가 바뀌어도 자기들 기록이 있으니까 지금도 나를 반기더라고요. 동양인 중에 내가 가장 오랜 고객이라고 하면서. 그런 게 시스템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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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변화가 참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를 알려면 유럽 경제를 알아야 해요. 어떻게 변하고 발전하고 있는지, 어느 나라가 선도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미국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안 가봐도 다 아는 것이지요. 결국은 미국과 유럽 일본이 아니겠어요. (사무실 벽에 있는 인도와 중국 베트남 지도를 가리키면서)요즘은 중국이 상당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인도도 정신차렸고요. 최근에 몇 차례 갔는데, 인도가 이전에는 뉴델리를 중심으로 북에서 남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IT를 중심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더군요. 흥미로웠어요.
-중국은 어떻게 보십니까.
▶웬만하면 다 (중국에)뺏길 것이라고 생각이 드니. 대중국 전략을 어떻게 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순간이 됐어요. 우리나라 굉장히 어려운 시기입니다. (중국으로)쑥쑥 빠져나가고 있어요. 대우조선을 포스코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도 중국 때문이지요. 포스코가 하면 절대 안 빼앗깁니다. 재정적으로 자금도 충분하고요. 요즘 재무구조도 엉망이고 적자상태인 기업들이 돈을 빌려서 너도나도 달려들고 있던데…. (매각을)하루라도 빨리 해야 합니다. 왜 질질 끄는지 모르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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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대외관계가 요즘 복잡합니다.
▶우리나라가 선진화를 빨리 해야 해요. 능력이 없으면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마음대로 해버릴 수 있거든요. 자칫하면 한반도 전체가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수 있어요. 우리가 발전해서 우리가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중국과 러시아 미국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도하는 것에도 동의해줄 것이고. 지금 젊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독도 문제로 한ㆍ일 관계가 얼어붙었습니다. 대일 창구가 없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내가 보기에도 답답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난 지금도 일본 측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이제는 다들 80이 넘었죠. 나한테서 일본 관계를 배운 사람들도 많은데 일본문제 잘 해결해야 해요. 일본을 구석구석까지 알아야 대화가 됩니다. 예전에 굉장히 나를 싫어하는 일본인이 있었는데 내가 계속 접촉하니까 결국 고꾸라지더군요. 내가 진심으로 대하면 되는 겁니다.
-한ㆍ중ㆍ일 경제협력도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단독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경제구조 자체가 해외의존도가 높기 때문이죠. 중국 일본과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특히 중국과 협력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기업들이 중국과 협력을 위해 뛰어다닐 때예요. 기업들이 물건 안 팔린다고 하지만 중국은 한 건만 해도 크지 않나요. 중국은 홍콩 광둥성만 해도 옛날부터 큰 시장입니다. 중국 전체가 큰 시장이죠. 가만히 앉아서 걱정하면 뭐합니까. 마케팅부터 뛰고, 최고경영자 자신들부터 뛰어야 해요.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산은 잘하지만 비용 손실이 많아요. 생산성을 보다 높이고 기술과 자본이 그것을 제대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중국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저렇게 뛰는데 우리에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한국은 중국과 가장 가깝고, 중국은 가장 잠재력이 있으니. 중국이 저렇게 뛰어다닐 때 기회도 많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 움직임에 편승하지 못하는 것 같아 굉장히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중국이 날아 버리면 다시는 그런 기회 안 올 텐데.
-한반도에 다른 변수는 어떤 게 있을까요.
▶북한을 제대로 봐야 해요. 북한을 보면 김정일이 과연 혼자서 통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군부하고 같이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군요. 중국이나 러시아와는 과연 어느 정도나 친한지도 면밀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세계 철강시장도 변화가 많습니다. 어떻게 보나요
▶부문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 경영전략으로 들어가면 세계 철강시장을 면밀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철 수요를 먼저 보면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에서 과연 지금 같은 소비가 지속될지, 아프리카나 동남아 수요는 어떻게 변하는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2000만t에서 유지하면서 품질과 기술을 더욱 관리해야 할지, 아니면 1000만t 더 늘려야 하는 상황인지 세계 철강 판도를 잘 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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