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던 TV앞에 모여 고개를 쭈뼛거리며 박치기의 순간을 가슴 조이던 시절이 눈앞에 생생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이 서너 번이나 바뀌었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영원한 영웅이 떠난 날,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내렸다. 하늘조차 영웅의 최후를 슬퍼하듯 숨을 죽이며 보슬보슬 대지를 적시던 날, 무심코 차를 몰아 여수로 향했다. 반나절 아니 두서너 시간의 추억여행인 셈이다.
우연히 켠 라디오에서 ‘For The Good Times’가 흘렀다. ‘알 그린(Al Green)’의 텁텁한 막걸리 같은 구수함이 어느덧 영웅이 있어서 한없이 좋았던 그 시절로 차를 몰아갔다. 마치 경주하듯 질주하는 차들을 피해 뒷길로 접어들었다. 순천에서 여수 가는 두 길 중에 매우 낭만적인 길이다.
과속방지턱이 많아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듯하기도 하지만 누렇게 고개 숙인 벼들이 정답게 손짓하고 창 너머로 바다 냄새가 코를 유혹하는 길.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들리는 갈매기들의 끼룩거림에도 시선이 머문다. 사람들은 그 길을 빨리 빨리 사는 이들의 휴식처요, 느림의 미학을 아는 이들의 안방 같은 길이라고도 한다.
도착시각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길을 달린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바보 같은 천재다. 차라리 시계를 풀어놓고 가야하는 길인 것이다. 가다가 해가 진다면 그 사람은 갈 길 바쁜 석양의 나그네가 아니라 최고의 행운아가 된다. 대도시 주변 외곽도로들이 그러하듯이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차를 멈추고 차라도 한 잔 마시고픈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끝까지 가고 싶었지만 다시 돌아와야 했던 길이었기에 어느 카페에 들러 차를 주문했다. 이윽고 버릇처럼 아까 오면서 들었던 Al Green의 For The Good Times를 청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이룰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희망사항을 더욱 불태우는 계기를 한 번 더 마련하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허전함이 덜컹거렸다.
언젠가 이 길 어디에라도 그 좋았던 시절로의 추억여행이 가능하게 음악카페를 하나 만들자. 그래서 오늘 나와 같은 이런 허전함을 어느 누구도 느끼지 않도록 해보자.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다짐을 반복했다.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십시오. 다 지나간 일인데 뭘 그러세요. 하지만 인생은 계속 되고 이런 낡은 세상도 계속 돌고 돈답니다. 우리는 단지 기뻐하기만 합시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이 있었으니 이제 끝나 버린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Don’t look so sad I know it’s over’ 이렇게 시작하여 ‘For the good times’로 끝나는 알 그린의 노래는 자연과 어우러진 한 편의 Nature’s Symphony로 영웅이 떠난 허전함을 달래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