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국의 초가을 날씨가 참 좋습니다. 습기도 적고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네요."
데뷔 20주년을 맞은 일본 '피아노의 시인' 유키 구라모토(57)는 자연과 삶에서 길러낸 선율로 지친 일상을 위로해준다.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그의 음악은 '심리치료제'로 통한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삶의 속도에서 한 템포 늦춘 피아노 선율로 마음의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비록 번잡한 도쿄에서 살지만 그는 차분하고 맑은 음악을 위해 도시 소음에서 자신을 차단시키려 애쓴다. 베란다에는 나무와 꽃을 많이 키우고 집 근처 요요기공원을 자주 찾는다.
"라흐마니노프와 바흐, 쇼팽의 작품과 인생, 그리고 자연에서 음악적 에너지를 얻어요. 소박하고 깨끗한 자연을 연주하면서 내 마음의 상처도 치유하죠. 나쁘게 보면 음악을 위해 자연을 너무 이용하는 거죠."
우리에게 삶을 되돌아볼 여유를 가지라고 일러주는 그는 유달리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피아니스트다. 1999년 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처음 공연한 후 거의 매년 내한무대에 서고 있으며 늘 매진이다. 그 비결이 뭔지 묻자 "나도 물어보고 싶어요"라고 한국어로 대답했다. 4년 전 일본 NHK방송의 한국어 강좌 프로그램에 학생으로 출연해 배운 실력인데 발음이 분명했다. 당시 20회 초급 강좌를 들은 후 간간이 책으로 공부했지만 유창하지는 않다며 쑥스러워했다.
28일 매일경제신문사를 방문한 그는 동그란 안경 너머 진지한 눈빛으로 "10년 전부터 한국 젊은이들이 내 CD를 사서 듣고 좋아했다"며 "내 음악이 다른 나라에서 통하다니 기적이다. 한국인들은 좋은 귀를 가진 것 같다"고 웃었다.
그의 음악적 매력은 여러 장르에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뉴에이지 음악에 집중해 완성도를 높인다는 데 있다. 라면이나 스테이크, 돈가스 등 아무거나 파는 식당 음식이 맛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우동을 만드는 게 여러 종류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힘든 법이다.
내공 높은 음악으로 관객과 교감하는 그는 더 큰 공감대를 쌓기 위해 한국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외국어를 배웠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에서 인기를 끌게 되면서 소프라노 조수미와 가수 신승훈 등 국내 음악가들과 교류하게 됐다. 조수미와 드라마 '주몽' 메인 테마곡 '사랑의 기억'을 녹음했고, 신승훈과 함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유키는 "두 분 다 음악성과 인간성이 좋아 전화와 꽃다발을 자주 주고받는다"며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에게 조언도 주고 많이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 부는 한류(韓流)도 흥미롭게 지켜봤다고 했다. 최근 그 열기가 많이 식었지만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아직도 배용준이나 송승헌, 박용하 고정 팬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일본인들이 드라마에만 열광했다면 요즘에는 영화와 음악, 음식 등으로 관심의 폭이 넓어졌어요."
최근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ㆍ일 양국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그는 문화 교류를 통해 가까워진 두 나라 국민이 정치인들의 실언으로 멀어지는 게 두렵다고 했다. 유키는 "문화예술이 정치나 외교문제를 뛰어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의 음악을 사랑한다. 30일 제주 컨벤션센터에서 출발해 9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등으로 이어지는 전국 투어 예매율이 높다. 그리고 오는 10월 14~16일 글로벌 리더들이 모이는 매일경제신문의 세계지식포럼 개막식 축하무대에 선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미셸 김과 협연하며 특강도 할 예정이다.
유키는 "일본대사관에서 성대하고 좋은 행사라고 들었다"며 "세계적 지성인들이 모여 지구촌 경제와 미래를 논하는 자리인 만큼 뜻깊은 음악을 들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전지현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