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

어느 소리체험 후 나는 병이 났다

오디오전도사 2006. 8. 24. 23:09

어느 소리체험 후 나는 병이 났다
('03.3.17. 순천 빌보드레코드, 정현빈)


그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는 거리였지만 고속도로를 달렸다. 빨리 가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곳에서 재빨리 빠져 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일이지만 한 때는 오디오의 맛, 아니 소리를 찾아서 끝없는 방황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오직 소리와의 전쟁이었고 음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방황의 끝은 Lynyrd Skynyrd의 < Free Bird > Live처럼 끝없이 유혹의 손짓을 했고 좀처럼 종착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기나긴 터널을 빠져 나와 겨우 음악을 벗삼아 촘촘히 하루하루를 가꾸어가고 있는데, 지금 다시 그 기나긴 터널의 입구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밀려왔고 도중에 다시 돌아올 생각과 수 차례 반복해서 협상하고 달래보기도 하였다. 물론 고속도로라는 상황이 쉽게 되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최초의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들어가 다시 돌아 나오기는 더더욱 싫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한 번 발동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음악과 소리를 찾아 교묘히 그 경계를 넘나드는 끼 때문에 그 곳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약 두 시간의 참새 방앗간(김덕수사물놀이 팀의 다이내믹 코리아 공연 관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곳을 찾아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앞이 깜깜해 왔고 이어지는 소리체험은 감기 초기 증상을 바로 불러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말문이 막혀 서서히 기가 죽기 시작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정연한 논리와 언변으로 몇 마디 감상을 늘어놨을 상황이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가끔씩 한 두 마디 신음소리만이 정적을 깨워 현실로 돌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탄사와 그 여운이었으며, 시름시름 앓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한참을 달구어진 진공관의 그 영롱한 불빛, 이글거리지는 않았지만 정열적이었고 마치 달빛을 가득 품은 백두산천지 같았고 별빛을 받아 살포시 피어나는 초가지붕 위의 박꽃 같아서, 세파에 시달리며 어디선가 분실해 버린 어릴 적 꿈을 그 속에서 다시 찾은 것 같은 묘한 흥분이 일었다.

한없이 따뜻한 소리,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미녀를 대하는 것 같은 흥분, 소리 때문에 잠시 잊고 살았던 음악을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라이브 음반, 로저 와그너 합창단, 그리고 오디오 테스트용 음반 등이 차례로 연주되는 동안, 그 두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꿈이었던 것 같다.

인공적인 소리가 들리기 쉬운 보통의 오디오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온돌방 아랫목 같은 따뜻한 음악,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같은 순결한 아름다움, 뽀드득 뽀드득 첫눈을 밟으며 먼 미래를 약속하는 연인들의 밀어 같은 소박하면서도 달콤한 음악, 지금껏 애써 찾아 헤매던 소리가 아닌 음악이 들리는 것이었다.

아! 이를 어쩔꼬. 음악은 찾았는데 가슴이 이토록 아파 오니... .

|글| 정현빈(artrock-jung@hanmail.net) 빌보드 레코드 대표

 

( 이 글은 오래된 음악친구인 순천 빌보드레코드 정현빈 사장이 '03.3.4. 저녁  김덕수사물놀이 팀의 다이내믹 코리아 백운아트홀 공연을 관람하시고 차 한잔 하기 위해 홈지기의 집을 방문하여 홈지기가 얼마전 자작하여 조정중에 있는, 오됴이야기에 실려 있는, VV-30B 싱글 모노블럭 진공관 앰프를 들어보시고 감상평을 '03.3.17.자 순천시민의 신문에 게재한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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